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팔레올로고스 왕조 (문단 편집) === [[미하일 8세]](1258~1282) === [[니케아 제국]]의 총사령관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콤니노스 팔레올로고스의 아들로, [[요안니스 3세]]의 증손녀인 [[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와 결혼하여 [[라스카리스 왕조]]의 인척이 되었다. 젊을 때부터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발휘하여 30살 때인 1253년 제국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테오도로스 2세]]의 심한 견제를 받았고, 1256년 역모죄로 몰리자 [[룸 술탄국]]으로 망명했다. 얼마 후 테오도로스의 용서를 받고 제국에 복귀했지만, [[이피로스 전제군주국]]과의 전쟁에 500명만 맡아 출진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선전했으나, 1257년 이피로스군이 테살로니키 성문 앞까지 이르는 걸 허용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 1258년 테오도로스 2세가 사망한 뒤 8살의 어린 황제 [[요안니스 4세]]가 황위에 올랐다. 황제의 최측근이었던 요르요스 무잘론과 형제들이 섭정단으로 임명되었으나, 테오도로스가 사망한 지 9일 만에 테오도로스의 장례식이 한창이던 소산드라 수도원에서 귀족들이 정변을 일으켜 무잘론 형제를 죽였다. 귀족들은 감옥에 갇혀있던 미하일을 석방시켜 섭정을 맡게 하였고, 그해 12월 요안니스와 함께 공동 황제로 등극하게 했다. 미하일은 빈민들에게 자금을 나눠주고 국유지를 빈농에게 하사해 민심을 샀고, 1259년 9월 [[아카이아 공국]], [[아테네 공국]], 테살리아, [[시칠리아 왕국]]의 연합군을 상대로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이후 [[라틴 제국]]을 향해 수차례 공격을 가한 끝에 1261년 7월 25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고 8월 15일 환도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미하일은 성공에 취한 나머지 무리수를 연이어 두기 시작했다. 1261년 12월 25일 11살의 어린 황제 요안니스 4세를 긴급 체포한 뒤 실명형에 처한 후 비티니아의 마르마라 해 디키비제 요새에 감금했다. 또한 니케아 제국을 지방정권으로 격하했다. 이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아르세니오스 아우토리아노스]]가 분노하여 미하일을 [[파문]]했다. 미하일이 파문을 거두어 달라 청하자, 그는 [[알렉시오스 1세]]가 쿠데타로 제위를 차지한 뒤 거친 옷을 입고 맨바닥에서 자며 40일 동안 참회했던 것처럼 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미하일은 그가 라스카리스 왕조의 지지자들과 결탁했다는 참언을 믿고 요구를 거부했고, 두 사람은 4년간 대립했다. 미하일은 교황에게 항소를 하겠다고 위협하며 파문을 철회하려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자, 1265년 5월 공의회를 소집한 뒤 아르세니오스를 폐위하고 프로코네소스 섬으로 유배했다. 미하일의 이같은 조치에 수많은 성직자와 민중이 반발하였다. 특히 라스카리스 왕조를 선망의 눈길로 바라봤던 소아시아 주민들의 반발이 극심했다. 반면 발칸 반도의 로마인들은 미하일이 자신들을 라틴인으로부터 구원했다고 여겨 그를 지지했다. 이리하여 발칸 반도의 친 팔레올로고스파와 소아시아의 친 라스카리스파가 격렬하게 대립하면서 벌어진 [[아르세니오스 분열]]은 장장 50여 년간 이어지면서 막 부흥하려던 동로마 제국의 상승세를 꺾어버리고 도리어 쇠락의 길을 걷게 하였다. 미하일은 잃어버린 인기를 만회하기 위해 발칸 반도 영토의 수복에 나섰으나 [[라틴 제국]]을 후원했던 [[베네치아 공화국]]과 [[시칠리아 왕국]]의 공세에 맞서야 했으며, [[이피로스 전제군주국]]과도 전쟁을 치러야 했다. 여기에 [[아카이아 공국]]과 [[아테네 공국]]의 반격도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불가리아 제2제국]]과 [[세르비아 왕국(1217년~1346년)|세르비아 왕국]] 역시 동로마 제국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제국 동쪽 소아시아에서는 [[일 칸국]]에 의해 무력화된 [[룸 술탄국]]의 통제에서 벗어난 튀르크인들이 서쪽으로 이주해 로마의 영토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동로마 제국은 사방의 적과 동시에 전쟁을 치러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다. 미하일은 이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외교 협상을 벌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그 과정에서 서방 교회와의 통합 운동을 전개해 1274년 교회 일치를 선포했으나, 그나마 그를 지지했던 주교와 신자들마저 적으로 돌리는 결과만 가져왔다. 설상가상으로, 1279년 교황 마르티노 4세는 미하일을 파문하고 시칠리아 왕국-베네치아 공화국과 오르비에토 조약을 체결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향한 원정을 벌이게 하였다. 이에 미하일은 [[아라곤 왕국]]의 [[페드로 3세]]에게 시칠리아를 공격하라고 부추겼고, 마침 1282년 3월 30일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이 발발하면서 카롤로 1세를 따르던 프랑스 군인들이 몰살당하자, 페드로 3세는 즉시 시칠리아에 상륙한 뒤 '시칠리아 왕국의 페드로 1세'를 칭했다. [[카를루 1세]]는 나폴리로 후퇴한 뒤 시칠리아를 되찾기 위해 아라곤 왕국과 전쟁을 벌였다. 이리하여 시칠리아와 베네치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원정은 무산되었다. 미하일은 소아시아를 갉아먹는 튀르크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프리기아 원정을 개시했으나, 트라키아의 파코미오스 마을에서 간질환으로 사망했다. [[정교회]] 수도자들은 정통성 있는 어린 황제에게 실명형을 내리고 평생 유폐시켰을 뿐만 아니라 동서교회 통합정책을 강요한 그에게 강한 반감을 품어서 장례식 집전을 거부하였고, 미하일의 유해는 잠시 암매장되었다가 셀림브리아의 한 교회에 이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